"여기 마시멜로 하나가 있단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제 잠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올 거야. 우리 친구가 그때까지 이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린다면, 선생님한테서 마시멜로 하나를 더 받을 수 있어. 하지만 선생님이 돌아오기 전에 못 참고 먹어 버린다면, 마시멜로는 그것 하나뿐이야."
저 유명한 마시멜로 실험 이야기입니다. 이 실험은 "...그때 끝까지 잘 참아냈던 아동들은 훗날 많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참지 못하고 먹어버린 아동들은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고 있었다" 류의 자기계발적인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평생교육원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놀란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상대로 테스트해 봤더니 부모가 입을 떼기도 전에 마시멜로를 입 속에 넣더라는 경험담들도 떠돕니다.
심리학과 학부 수준에서는 마시멜로 실험의 목적을 자기통제(self-control)의 존재를 밝혀내기 위함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자기통제란, 외부의 어떤 달콤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 유혹을 이겨내어 마침내 더 큰 보상을 얻어낼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심리학과 대학원 수준으로 올라가면 이제 용어는 장기적 목표추구(long-term goal pursuit)로 조금 더 길어집니다. 의미는 대동소이한데, 장기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기적 이익에 주의가 분산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동기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거지론 이야기에 왜 뜬금없이 마시멜로 실험 이야기를 하느냐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제가 다른 곳에다 등록하려던 글을 잘못해서 설거지론 글에다 실수로 등록한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설거지론(과 오늘날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는 모든 공정성 논쟁들)의 기원을 제대로 '설명' 한 적이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었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저 '규탄' 만 했을 뿐입니다. 무엇을 설명하려면, 설명하기 위한 인식론적 틀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사용할 인식론적 틀은 바로 장기적 목표추구에 관련된 두 가지 심리학 이론입니다.
아이들은 이럴 때 유혹을 참는다 : ① 그 유혹을 무미건조한 자극으로 인식할 때
마시멜로 실험의 주최자였던 심리학자 왈터 미셸(Walter Mischel)은 자신의 실험이 한낱 자기계발적인 훈계에 그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때 눈앞의 마시멜로의 유혹을 참아냈던 아이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어떤 아이들은 눈을 감기도 했고, 숫자를 세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몸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유혹이 이런 식으로 회피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미셸이 관심을 가졌던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도 그 유혹을 잘 참아냈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왈터 미셸은 상당한 성과를 얻었습니다. 참아낸 아이들과 참아내지 못한 아이들은 마시멜로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머릿속에서 어떻게 그려내는지에 결정적인 차이를 보였습니다. 참아내지 못한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보면서 달콤하고, 촉촉하고, 보드랍고, 살살 녹고, 목넘김이 좋은 감각을 떠올렸습니다. 그 짜릿한 감각이 뇌리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결국 마시멜로에 손을 뻗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참아낸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보는 동안 건조하고, 푸석푸석하고, 목이 메이고, 꾸덕거리는 감각을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부터, 마시멜로는 더 이상 매력적인 간식이 아니었습니다.
마시멜로의 비유를 어른들의 삶 속에 닥쳐오는 수많은 유혹들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목돈을 모아야 하는 사람이 당장 눈 앞의 과소비의 유혹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구매할 물건이 주는 기쁨을 무미건조한 것으로 인식해야만 그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방법은 신체적으로 회피 행동을 할 수 없는 유혹일 때 더욱 효과적입니다. 감각을 떠올리는 방식을 바꾸기만 한다면, 유혹적으로 느껴졌던 그것이 심지어는 몹시 거북하게 느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왈터 미셸의 자기통제 이론(self-control theory)을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럴 때 유혹을 참는다 : ② 장기적 보상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을 때
간혹가다 마시멜로 실험 이야기가 인터넷에서 화제에 오르면, 누군가가 빈정거리며 "그거 사실 죄다 반박된 이론임. 알고보니 그 애들이 실험자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참았던 거라고 함. 과몰입 ㄴㄴ" 하는 모습이 종종 보입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말씀드리자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반박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을 두 가지 이론이 서로 다른 메커니즘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현실은 두 가지 메커니즘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아이들의 인내심을 설명하는 둘째 이론은 워털루 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J. Lerner)가 제창한 공정한 세상 이론(just world theory)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세상이 원래 공정한 곳이라고 전제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적선지가(積善之家)에는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적악지가(積惡之家)에는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고 아무 근거도 없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 을 바탕으로 우리는 사회를 꾸려 간다는 것이 공정한 세상 이론입니다.
공정한 세상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 모든 아이들은 실험자의 안내에 따라서 마시멜로를 잘 참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 낯선 '선생님' 이 자기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을 것도 아니고, 세상이 공정하다는 신념에 따라서 그 '선생님' 도 어쨌거나 자신이 약속을 지키면 마시멜로를 하나 더 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실험자가 자신을 공정하게 대해 주리라는 기대가 있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양육 환경이나 잘못된 훈육으로 인하여 그 기대가 깨져 버렸을 때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잘 참아낸 아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참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허겁지겁 먹어치운 아이들이야말로 설명을 요하는 흥미로운 상황입니다. 그들은 어른들이 약속대로 자신에게 추가 마시멜로를 보상으로 줄 거라는 장담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떨어질지 어쩔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마시멜로를 무작정 기다리느니, 당장 눈 앞의 확실한 하나라도 챙기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이처럼 자신에게 공정한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그 사람은 굳이 오랫동안 유혹을 견디느니 당장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즐기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등생들을 길러냈는가 : 너무 많이 쌓여 버린 마시멜로의 부채
A.
"어허, 또 딴 생각 한다! 집중해야지! 허리 펴고, 시선 똑바로 두고!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나가 놀기만 하니까 감기에 걸리지!"
B.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지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공부해야 나중에 인생 풀린다? 지금 한 자라도 더 읽어 놔라, 나중에 고맙다고 아주 절을 할 거다."
우리는 집중 못 하고 책상에서 내려오기 바쁜 아이들을 우등생으로 만들기 위해서 위의 두 가지 전략 중 하나를 사용해 왔습니다. 위의 마시멜로 이야기를 잘 따라왔다면, A) 전략은 자기통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당장 나가 놀면 감기에 걸려서 끙끙 앓으며 고생한다) 또한 B) 전략은 공정한 세상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당장 나가 놀고 싶어도 꾹 참고 공부해야 나중에 더 큰 보상이 기다린다).
그런데 A) 전략에 비해서 B) 전략이 갖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우등생들에게 어릴 때 약속했었던 '마시멜로' 를 줘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A) 전략을 따라 공부해 온 우등생은 딱히 더 마시멜로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미래의 보상에 대한 별다른 약속 없이도 그저 자기 멘탈을 챙기면서 알아서 잘 공부해 왔기 때문입니다. 반면 B) 전략을 따라 공부해 온 우등생은, 세상이 자신에게 마시멜로를 주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권리의식(entitlement)을 주장하게 됩니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어서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안정적이다 보니 2030 시절에 곧바로 꽃을 피우거나 대성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예전에 쓴 글에서 소개한 통계에 따르면, 사회적 시계가 어찌나 느려지는지 3040 연령대인데도 부모님께 여전히 용돈을 타 쓰는 '사실상의 미성년자' 인구가 무려 65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그 우등생들에게 당장 줄 수 있는 마시멜로가 딱히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일종의 '마시멜로 채권자' 가 되어, 우리 사회가 약자들에게 희소한 기회를 할당하거나 혹은 기득권층이 그런 제도를 악용하는 모습을 적발하면 곧바로 달려들어서 마시멜로의 '압류' 딱지를 붙이려고 듭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품은 울분의 정체를 알지 못하니 그걸 '공정' 이라는 엉뚱한 용어로 이름붙입니다.
설거지론, 약속을 어기고 마시멜로를 주지 않은 사회를 향한 울분의 표출
이제 이 오랜 설거지론 규탄 궐기대회의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만큼 규탄을 했으면 이제 누군가는 나서서 설명을 해야 분위기가 매듭이 지어집니다. 어떤 학생들은 학창시절에 '나도 나중에 남부럽지 않게 연애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다' 는 소박한 기대를 갖고, 그 기대를 이루어 주겠노라고 약속하는 어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채 독하게 마음먹고 공부해 왔습니다. 그런 그들이 공부가 모두 끝나고 세상을 내다보았을 때 '처음부터 마시멜로 같은 건 없었고, 우리는 그저 눈앞의 쾌락을 즐기는 인생들이 한창 즐기고 간 설거지를 해야 하는 처지다' 라고 믿게 만든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정상 연애, 정상 가정, 정상적인 남친, 정상적인 여친... 그 모든 정상성의 약속을 해 놓고서 이제 와서는 뒤늦게 여성혐오다 뭐다 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한다면 우리 역시 언행이 이중적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만 쏙 빠져나와서 이 시대의 혐오에 혀를 끌끌 차며 "역시 그 놈들은 문제야" 라고 손가락질하기에는, 우리 자신도 똑같이 낯부끄러운 처지입니다. 모두가 자기만의 색깔로 이루어가야 할 인생의 과업들을 마치 반드시 줄 마시멜로인 것처럼 감미로운 말로 속여 가며 당장 책상 앞에 붙잡아 놓기만 했던 것은 무책임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통찰은, '차라리 처음부터 자기통제에 의존하는 법을 가르쳤다면 뒤늦게 마시멜로의 채무가 몰려오지는 않았을 텐데' 일 것입니다. 공정 담론에 명문대 학생들이 유독 민감하기는 하다지만, 그들이 자기통제 기법을 배워서 눈앞의 유혹을 무미건조한 성질로 인식하였다면 제 아무리 사회적 시계가 느려지고 만족 지연이 한없이 길어져도 설거지론 같은 아이디어가 호응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 발짝 과감하게 내딛어 보겠습니다. 물론 위 얼룩소 글에서 남학교와 여학교를 막론하고 미래의 마시멜로의 약속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여학생들은 주로 자기통제에 입각하는 A) 전략으로 공부를 시키는 반면, 남학생들은 주로 공정한 세상 신념에 입각하는 B) 전략으로 공부를 시키는 경향이 있다' 면 어떨까요? 명문대 학생들이 전체적으로 공정 담론에 더 민감하다지만, 그 중에서도 명문대 남학생들은 명문대 여학생들보다 더더욱 민감한 양상을 보입니다. 어쩌면 여학생들은 자기통제 기법을 이미 어느 정도 활용해 왔기 때문에 미래의 마시멜로가 덜 아쉬운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논리를 전개하기에는 조금 뒤탈이 걱정되니, 안전하게 영가설로 가 봅시다. 즉, 남학생이라고 해서 굳이 더 B) 전략으로 공부시키는 게 아니고, 여학생이라고 해서 굳이 더 A) 전략으로 공부시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더 심각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명문대 여학생들이 아직껏 받지 못한 마시멜로의 빚은 대체 어디에 쌓여서 우리의 머리 위로 쏟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이 여학생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설거지론에 대응되는 울분을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까? (더 답답한 것은, 왜 아직까지 설거지론을 성토해 온 그 누구도 여기까지 논의를 끌고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왜 공부를 선택한 당신의 20대가 마치 밑지는 장사였던 것처럼 말하는가" 를 설명하다
"설거지론의 연대기가 처음 시작된 20대로 돌아가보자. 연애 대신 공부를 선택했던 '순수한' 당신의 젊은 시절 말이다. 이때 공부했다면 공부한 것이고, 연애했다면 연애한 것이다. 왜 공부를 선택한 당신의 20대가 마치 밑지는 장사였던 것처럼, 저당이라도 잡힌 것처럼 말하는가."
네,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설거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연애 대신에 공부를 선택할 때 어른들에게서 한 가지 중요한 약속을 들었습니다. 지금 달콤한 연애 대신에 괴로운 공부를 선택한다면, 나중에 공부가 끝나고 사회에 나왔을 때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호언장담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어른들은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 면서 여성혐오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고, "남편이 타는 차가 바뀐다" 면서 결혼이라는 친밀한 어울림을 비인간적인 무언가처럼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순수하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명문대에 들어갔고, 무사히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나왔을 때 마시멜로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공정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세상이 자신들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못 받은 돈을 받아내려는 해결사들처럼 사회 곳곳을 이 잡듯 뒤졌습니다. 누군가가 농어촌 전형으로 명문대에 입학했고, 누군가가 부모 힘을 써서 국가대표 출전 자격을 따냈으며, 인맥이 꽤나 수상한 누군가는 운 좋게도 아주 간단한 준비만으로 어마어마한 자리에 영전했습니다. 그 순수한 우등생들은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할 마시멜로를 그들이 빼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친밀한 어울림에 있어서도 이들은 기대에 못 미치는 연애 경험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분명 명문대 출신에게는 그만한 '트로피' 가 주어질 것처럼 약속해 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만난 배우자는 과거가 복잡했고, 지금이라도 자신을 사랑해 준다면 모르겠는데 사랑의 표현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이건 순결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설령 순결이 중요하다 해도 그것은 그들에게 '순결한 배우자' 를 명문대 졸업의 보상으로 약속했던 어른들의 헛된 약속에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이건 마치 '눈앞의 쾌락만을 좇는' 인생들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고, '오랫동안 쾌락을 참으며 자기경영을 해 온' 인생들이 가장 불행해지는 구조인 것처럼 보였고, 그것이야말로 설거지론이 내세우는 가장 진지한 질문이었습니다.
"공부했다면 공부한 것이고, 연애했다면 연애한 것" 이라는 말은 안타깝지만 이 지점에서 설득력을 잃습니다. 설거지론의 추종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말은 우리가 학창시절에 어떻게 스스로를 규율하며 그 지겨운 공부를 꾸준히 해올 수 있었는지를 전혀 성찰하지 않은 입바른 말처럼 들릴 뿐입니다. (아니면 노는 것만큼이나 공부가 재미있었다고 생각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나 할 법한 생각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 역시 남들은 자기 같지 않다는 걸 망각했다는 한계를 지닙니다.) 우리의 공부는, 아니 적어도 그들의 공부는,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설거지론은 미래의 불확실한 보상을 섣부르게 약속함으로써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장기적 목표추구에 정진하게 하려던 어른들의 선의가 아주 제대로 어긋나 버린 결과물입니다. 그들이 받아야 할 마시멜로는 어쨌든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투자한 십수 년의 값진 시간에 대해 우리가 사회 구성원으로써 마땅히 보답해야 할 책임입니다. 다만 그들이 바라던 것 그대로를 줄 수는 없고, 이 점에서는 그들의 이해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자녀들과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려면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통제 기법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짜릿할 것만 같은 유혹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도록 훈련하는 기법 말입니다. 물론, "맨날 게임만 하니까 감기에 걸리지!" 같은 말은 참 실없는 잔소리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더 공부해야 나중에 미남미녀 만난다!" 같은 말보다는 더 건강한 잔소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면 과학적으로 봐도 게임하다 감기에 걸리는 게 학창시절에 공부 더 해서 나중에 더 정상 연애를 하게 되는 것보다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 이런 걸즈 토크, 설마 한 번도 안 들어 보셨나요
"어머어머, 너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지금 남친이랑 결혼할 생각을 해? 어차피 처음 사귄 남자라며?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 최대한 남자 많이 만나봐야 하는 거야. 지금 남친 좋다고 바로 결혼해 봐라? 나중에 나이 들어서 그때 더 놀아볼 걸 못 놀았다며 엄청 후회한다? 어릴 때 남자들한테 사랑 많이 받아봐야 돼. 그러다가 이제 남은 평생을 의지할 남자를 찾으면 그때 결혼하는 거야. 언니들이 얘기할 때 귀담아 들어."
설거지론,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진실과 소위 '탈진실' 을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다고 섣불리 믿었던 어떤 용감한 진보주의자들이 가질 만한 사고방식에 가깝습니다. 설거지론을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여성들의 언어로 소통되던 연애에 얽힌 서사를 남성들의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본 결과물일 것입니다. 남성들이 주장하는 설거지론을 여성의 입장에서 다시 풀어 쓰면 위에 인용한 내용과 정확히 겹쳐집니다. (위의 인용문은 제가 실제로 20대 미혼 여성들과 30대 기혼 여성들이 함께 어울리는 자리에 있는 동안에 어깨너머로 직접 들은 것입니다.)
설거지론이 '혐오' 라는 한 단어로 끝날 문제일까요?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인간의 심리에 관심이 있지, 사회구조적인 억압 같은 거대한 이야기에는 숟가락을 잘 얹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에게는 항상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있는데, 무엇이 혐오라고 기왕 주장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그 대상을 다각도로 조명하면서 다양한 인간군상으로부터의 관점들을 고려해 보시고 그 다음에 혐오라는 최종 결론을 내려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저는 늘 그런 글을 읽기를 기대하지만, 너무 많은 글들이 그런 신중함은커녕 부르쥔 주먹을 하늘에 떨치며 목이 터져라 규탄하기만 하는 것을 봅니다. 저는 그런 궐기대회는 체할 것 같아서 이제는 그만 참석하고 싶습니다.
※ 얼룩소(alookso)에 제가 올렸다가 보관 중이던 게시글을 티스토리에 다시 게시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낡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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