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저것 좀 봐라, 저것 좀. 세상에 무슨 다 큰 애들을 아직도 기저귀를 채워 놓구, 아유 참. 기저귀는 빨리빨리 띠어 버려야지, 애기도 아니구 무슨..."
"그러게요. 외국은 다들 그런가 봐요, 어머님. 어머어머..."

그 무렵에도 어김없이 인터넷에는 '카페 머그컵에 소변을 받은 맘충' 이야기가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금과 그때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 부모님 댁에서는 언제나처럼 그 유명 육아 프로그램이 TV를 수놓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부모님과 연로하신 할머니에게는 화면에 나오는 너댓 살짜리의 혼혈 꼬마들이 식당과 카페에서 기저귀를 차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눈에 걸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시각에 제가 보았던 '맘충' 기사에서 그 난처한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소변을 급한 김에 머그컵에다 받았을 것입니다. 그 이미지는 의외로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어머니들은 아들의 소변이 급해 보이면 바지와 속옷을 훌렁 벗겨내리고 페트병부터 대어 줍니다. 아들의 말간 엉덩이가 바깥바람을 맞는 동안 페트병에는 노란 소변이 고입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정겹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점점 불쾌한 시선이 많아지는 듯합니다.

저 역시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불쾌한 이미지가 가시기 전에, 식당에서 기저귀를 찬 혼혈 꼬마들이 TV를 통해서 제 시야를 채웠습니다. 직감적으로 저는, 왜 우리는 저렇게 안 하지? 하는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실시간으로 제 부모님과 할머니로부터 나오고 있었지만, 의문은 더욱 커졌습니다. 왜 기저귀를 '빨리 떼어야' 한다는 거지?

그에 대한 잠정적인 대답은 언제나 "애기도 아니고 무슨..." 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화법을 주의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외현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 암묵적인 금기는 늘 그렇게 흐려지는 말끝에 가려집니다. (다른 대표적인 예시로는 "시커먼 남자들끼리 무슨..." 같은 표현이 있겠습니다.) 어쩌면 너댓 살이 되어서도 기저귀를 차는 것은 예상 밖의 의미를 지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나중으로 미루어 두고, 우선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영유아기 아동들은 대소변을 가리는 힘이 약하여, 언제 어디서 미리 볼일을 해결해야 할지 어른들이 도와주어야 하고, 임박한 요의를 참아내기도 더 어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른들이 세심하게 돕는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만한 양육자원을 가진 어른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화장실이 아이들을 따라다니게 하면 됩니다.

너댓 살이 되어서까지 기저귀를 차는 아이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그들이 공공장소에서 매우 예의 바르다고 칭찬해 줄 만합니다. 그 부모에게는 그들이 다른 시민들에게 베푸는 배려에 감사를 표하고,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예의범절을 교육하는 것에 성원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구태여 비판적(critical)인 접근법을 취하지 않고서 '맘충' 갈등을 줄이기 위해 제안하는 하나의 아이디어입니다.

맘충이라는 단어를 '일상적 혐오' 라는 접근법을 통해 개탄하는 것은, 적어도 제 견문에서는 이미 과포화되어 있기에 말을 더 얹을 필요가 없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매체에서 이미 그런 비판이 있었고 이곳 얼룩소라는 플랫폼에서도 이제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기저귀를 더 오랫동안 채우자는 제 의견은, 혹은 시민의 덕성을 통해서 도출된 바 그보다는 더 지혜롭고 그럴듯한 아이디어는, 저는 그다지 본 기억이 없습니다.

사려 깊은 부모가, 비록 자신의 자녀가 너댓 살쯤 되어서 충분히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공공장소에서 부모를 갑자기 난처하게 만들 것을 예상하여 미리 기저귀를 채운다면, 그것에 "애기도 아니고 무슨..." 이라며 반감을 드러낼 합당한 이유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아동의 수치심도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초등학생용' 야뇨증 기저귀까지도 시판되고 있으며, 공공장소에서 엉덩이를 드러내고 소변을 보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아동이 기저귀에 대해서 그리 수치심을 느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해외에서는 어린 자녀에게 한국보다 더 오랫동안 기저귀를 채우는 양육 규범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것의 득실을 따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해외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의 경험담이 빛을 발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왜 지금 당장 국내에 도입하지 못하는지, 어떻게 하면 부모들이 해외 선례를 따라서 '자발적으로' 기저귀 오래 채우기에 동참하게 할 수 있을지만 고민하면 됩니다.

이것은 저의 온건한 제안입니다. 이 제안에 혐오 담론을 엮지 못해서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뿌듯합니다. 기저귀는 미성숙함의 아이콘이 아니라 예의범절과 배려의 아이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발상의 전환은 자발적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제게 남은 문제는 왜 이것이 '발상의 전환' 까지 되어야 했는가입니다. 머그컵에 자녀의 소변을 받아야 했던 난감한 어머니의 뇌리에 왜 그 생각만큼은 스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제가 자녀가 없기에 이 이상으로는 생각이 닿지 못하는 것 같아, 육아 경험이 있으신 분들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 얼룩소(alookso)에 제가 올렸다가 보관 중이던 게시글을 티스토리에 다시 게시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낡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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