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심리학이 다룰 수 있는 갈등 중에서 가장 거시적인 수준의 갈등은 다름아닌 역사적 불의(historical injustice)로 인한 국가 간 갈등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일관계가 바로 이 갈등 유형에 해당하는 사회적 문제다. 지난 2015년에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인식조사에 따르면(왕길환, 2015), 한국 대학생들의 94.4%가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이 필요하다" 고 본 반면, 일본 대학생들의 과반수는 "이미 충분히 배상했다"(37.6%)거나 "더는 언급을 원치 않는다"(30.0%)고 응답했다. 여기서 양국 간의 관계는 인식의 차이로 인해 교착상태에 빠진다. 일본은 배상을 했으니 이제 해결됐다는 입장이고, 우리나라는 '여전히' 배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다행히도 사회심리학에는 이에 관련된 이론적 자원들이 준비되어 있다.

먼저 사회심리학의 첫째 진단은, 피해자 쪽과 가해자 쪽에서 각각 상이한 욕구에 이끌려서 화해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화해의 욕구 기반 모형(needs-based model of reconciliation)에 따르면(Shnabel & Nadler, 2008), 가해측에서는 화해를 통해 자신의 도덕성이 상대방에게 수용될 수 있겠다고 느낄 때 화해에 나서고, 피해측에서는 자신과 상대방 사이의 권력균형이 맞춰질 수 있다고 느낄 때 그 화해에 응한다. 이는 개인 간 갈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같은 국가 간 갈등에서도 설명력이 입증되었다(Shnabel et al., 2009). 이 논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지금까지의 사과와 배상으로는 제대로 된 권력 욕구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상하라' 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반면 지금까지의 사과와 (특히) 배상은 일본의 도덕성 수용의 욕구를 간편히 만족시켜 왔기 때문에, 유독 일본인들은 '이제 끝난 문제다' 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회심리학의 둘째 진단은, 사과와 배상은 화해의 '끝' 이 아니며, 시작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사과와 배상은 그저 화해를 향한 중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 층계 모형(staircase model)에 따르면(Hornsey et al., 2015; Wohl et al., 2011), 집단 간 화해를 위해서는 먼저 따라야 할 순서가 있다: 이는 순서대로 가해측의 집합적 죄책감, 역사관(歷史觀)의 합의, 사과 또는 배상 수준의 합의, 사과 또는 배상의 제공, 사과 이후의 관여이다. 그렇다면, 사과와 배상 이전에나 이후에나 해야 할 것들은 매우 많다. 만일 집합적 죄책감이나 역사관의 합의 없이 사과와 배상만 다짜고짜 전달된다면, 가해측은 해방감을 만끽하겠지만 피해측은 그것이 화해라고는 믿지 않는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일본의 금전적 배상을 목적으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2016~2020)의 초라한 해산은 당연한 귀결이었던 셈이다.

한일관계는 사과와 배상만으로 치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양쪽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차근차근 인식을 맞춰감으로써 개선될 수 있다. Hornsey et al.(2015)은 가해측이 도덕적 자기상을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간편한 수단이 사과와 (특히) 배상이기 때문에 자꾸 계단을 중간부터 밟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한국인들이 한일 관계발전의 걸림돌로 역사인식의 차이(78.4%)를 꼽았다는 설문을 상기하자(왕길환, 2015). 일본인들이 일제강점에 죄의식을 갖고, 한국인과 역사관을 공유하면서, 사과와 배상을 어떻게 할지를 합의한 후에야 비로소 사과와 배상이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사과는 한국인들이 극일(克日)의 권력 욕구를 충족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나아가 일본이 사과 이후에도 꾸준히 관계유지에 힘쓸 때, 마침내 일제강점이라는 역사적 불의가 해소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대문형무소를 참배하며 죄스러워하는 일본인들은 사회심리학의 생생한 교과서라 하겠다.



왕길환 (2015.02.04.). 일본 대학생들 "軍 위안부에 충분히 배상했다".
URL: https://www.yna.co.kr/view/AKR20150203192600371

Hornsey, M. J., Wohl, M. J., & Philpot, C. R. (2015). Collective apologies and their effects on forgiveness: Pessimistic evidence but constructive implications. Australian psychologist, 50(2), 106-114.
Shnabel, N., & Nadler, A. (2008). A needs-based model of reconciliation: Satisfying the differential emotional needs
of victim and perpetrator as a key to promoting reconcilia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4(1), 116-132.
Shnabel, N., Nadler, A., Ullrich, J., Dovidio, J. F., & Carmi, D. (2009). 
Promoting reconciliation through the satisfaction of the emotional needs of victimized and perpetrating group members: The needs-based model of reconciliation.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35(8), 1021-1030.
Wohl, M. J., Hornsey, M. J., & Philpot, C. R. (2011). A critical review of official public apologies: 
Aims, pitfalls, and a staircase model of effectiveness. Social Issues and Policy Review, 5(1), 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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