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4년에 가까워지는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현재까지 가장 많은 동의를 얻은 청원 기록은 무려 202만 6,252명에 달한다. 이 청원은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것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4%에 달하는 인구가 특정 성범죄 사건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2020년도에 발간된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조사에 따르면, 여성들의 57.0%와 남성들의 44.5%가 범죄로부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의식 속에서 적잖은 논자들이 여성들의 공포에 귀기울이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의 진보라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공포는 진보의 정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사회의 변혁과 발전을 이끄는 정서는 분노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비단 사회 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사회심리학 문헌에서도 확인 가능한 내용이다. 사회적 변화(social change)를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들은 (e.g., Frijda, Kuipers, & Schure, 1989; Van Zomeren, Postmes, & Spears, 2008) 대중의 집합적 분노(collective anger)와 정치적 효능감이 사회 운동의 참여를 촉진함을 확인하였다. 즉 현실의 부조리함을 정당화하지 않고 분노하면서, 자신들이 유의미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다른 요인들까지 함께 작용하면서 사람들이 사회적 변화를 위해 애쓰게 되고, 결국에는 진보가 이루어지게 된다.

반대로, 사회심리학자들은 공포가 그 사람의 사회적 태도를 보수화시킨다는 것을 확인하였다(see Jost, Stern, Rule, & Sterling, 2017). 일군의 연구자들은 우익 권위주의(이하 RWA)가 높은 사회적 태도와 이 세상이 '무서운 곳'(dangerous world)이라는 세계관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였다(Duckitt & Sibley, 2010). 일신의 안전이 위협 받고 개인이 취약해지게 되는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확고한 권위에 스스로를 의탁하며, 모험을 피하고 관습을 선호한다. 성범죄에 대한 공포가 극심할 때, 비록 그것이 정부 공권력이든 관습적인 '강간 예방수칙' 이든 심지어는 늠름한 남자친구의 완력이든 간에, 공포에 질린 여성은 그 밑에 숨어 움츠러들게 된다.

공포를 바탕으로 추동되는 진보적 변화는 달성되기 어려우며,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진보가 될 수 없다. 사회 운동가들은 "무서워서 못 살겠어요!" 라는 절규를 진보의 원동력으로 삼는 듯하나, 그 공포를 해소하는 것은 사회를 안전하게 하겠다는 RWA의 달콤한 약속뿐이다. 사회에 불안과 패닉이 팽배할 때 권위주의의 무대가 가장 빛난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 이슈를 보호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또 다른 가부장제에 불과하다는 Badinter(2003)의 지적은 현대 대한민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모든 약자들은 범죄로부터 보호받아야 마땅하나, 이를 굳이 생존의 문제로 호소하겠다면 그 운동은 사회를 진보적으로 변화시키리라 보기 어렵다.



Badinter, E. (2003). Fausse Route. Editions Odile Jacob.
Duckitt, J., & Sibley, C. G. (2010). Personality, ideology, prejudice, and politics: A dual-process motivational model.
Journal of personality, 78(6), 1861-1894.
Frijda, N. H., Kuipers, P., & Ter Schure, E. (1989). Relations among emotion, appraisal, and emotional action readines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57(2), 212-228.
Jost, J. T., Stern, C., Rule, N. O., & Sterling, J. (2017). The politics of fear: Is there an ideological asymmetry in existential motivation? Social cognition, 35(4), 324-353.
Van Zomeren, M., Postmes, T., & Spears, R. (2008). Toward an integrative social identity model of collective action:
A quantitative research synthesis of three socio-psychological perspectives. Psychological bulletin, 134(4), 50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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