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 세대는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서 2030 청년세대를 희생시키는가? 우리 사회에 세대 간의 착취가 존재한다는 주장에는 흔히 청년취업과 정년연장 간의 상충관계가 제시된다. 실제로 한국개발연구원 2020년 보고서에서는 정년이 55세에서 60세로 연장됨으로써 장년 1명의 고용이 유지되는 대가로 청년 0.4명의 고용이 감소함을 보였다(한요셉, 2020). 출판물 시장에서도 대략 2019년 1분기 이후로 세대 간 갈등관계에 주목하는 저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e.g., 이철승, 2019). 이상의 논리를 통칭하여 '착취 가설' 로 부르기로 하자. 실증적으로 이 가설이 틀렸다는 발견이 있지만(see 김창환, 김태호, 2020), 일단 이 글에서는 그것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이 글의 초점은, 착취 가설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인식의 모형이 아니라는 데 있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세대' 라는 단어 자체는 일반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잘 정의되지 못한' 단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말랑말랑한 의미로 소통되고, 많은 경우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정책입안자들까지 오도할 수 있으며, 정치적 도구로서 재정의되고 호명되곤 한다.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도 세대 개념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김창환, 2021). 그래서 세대 개념이 공론장에 오를 때에는 그것이 현실과 괴리된 정치적 도구로 오용되고 있는지 살펴야 하며, 세대 이외의 다른 가용한 인식의 틀을 탐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김선기, 2019). 이상을 이해한 상태에서, 여기서는 불필요한 개념적 모호성을 피하기 위해 '586 세대', '2030 세대', '청년세대' 등의 용어를 가급적 피하기로 하겠다. 다행히도, 이 주제에 대해서 세대론과는 전혀 다른 인식의 틀이 이미 존재하는데, 그 틀은 정의 문헌에서 찾아질 수 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대안적인 인식의 틀은, 이 문제를 가족 내에서의 '부모' 와 '자녀' 간의 관계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 관점을 따르는 어떤 정의 문헌에서는(Cook & Donnelly, 1995) 사회심리학의 고전적 이론 중 하나인 사회적 교환 이론(social exchange theory; Thibaut & Kelley, 1959)에 근거하여 논증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일방적으로 착취적인 사회적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착취' 가 성립하려면, 부모 또한 자녀에게 뭔가를 베풀어야만 한다. 실제로 Kahana와 동료들(1987)은 부모가 자식에게 봉양받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베푸는 부조(helping)행동을 보이며, 이는 자존감과 같은 여러 심리적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Cook & Donnelly(1995)는 이 부조가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다자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제공된다고 보완했다. 흔히 말하듯,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 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밥그릇을 앞에 두고 서로 만났을 때, 부모는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자녀를 굶기지 않는다. 
기존의 착취 가설은 부모가 자기 임금을 더 오래 타먹기 위해 자녀의 취업길을 가로막는 상황을 그려낸다. 언뜻 정년연장과 청년실업 문제는 이 가설로 잘 설명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부조 가설의 관점에서는, 월 500~600의 고임금을 받는 부모와 무직의 자녀로 구성된 가족이, (퇴직금 및 노령연금을 제하고) 은퇴한 부모와 월 200~300의 저임금을 받는 자녀로 구성된 가족보다 나을 수도 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경제적 처지를 늘 돌보기 때문이다. 소위 '586 세대' 가 '2030 청년세대' 의 처지에 정말로 신경을 쓴다는 점이 경험적으로 확인된다면, 우리는 한쪽을 다른 한쪽의 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 그때 우리의 관심은 청년 무직자들이 경험하는 무기력이나 부의 대물림 같은 문제들에 정책적으로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김선기 (2019). 청년팔이 사회: 세대론이 지배하는 일상 뒤집기. 오월의봄.
김창환 (2021). MZ"세대" - 세대 규정은 마케팅용 컨셉일 뿐. URL: https://sovidence.tistory.com/1158
김창환, 김태호 (2020). 세대 불평등은 증가하였는가? 세대 내, 세대 간 불평등 변화 요인 분석, 1999~2019. 한국사회학, 54(4), 161-205.
이철승 (2019). 불평등의 세대: 누가 한국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었는가. 문학과지성사.
한요셉 (2020). 정년 연장이 고령층과 청년층 고용에 미치는 효과 (KDI 정책포럼 제277호). 한국개발연구원.
Cook, K. S., & Donnelly, S. (1995). Intergenerational relations, 
inequality, and social justice. In L. Montada, & M. J. Lerner (Eds.), Current societal concerns about justice (pp. 67-83). Springer.
Kahana, E., Midlarsky, E., & Kahana, B. (1987). Beyond dependency, autonomy, and exchange: 
Prosocial behavior in late-life adaptation. Social justice research, 1, 439-459.
Thibaut, N., & Kelley, H. (1959). The social psychology of groups. New York Wiley.

Jackson Jr, J. P., & Winston, A. S. (2021). The mythical taboo on race and intelligence. Review of general psychology, 25(1), 3-26.

URL: https://journals.sagepub.com/doi/abs/10.1177/1089268020953622

 

The Mythical Taboo on Race and Intelligence
인종과 지능에 대한 금기라는 허상

Recent discussions have revived old claims that hereditarian research on race differences in intelligence has been subject to a long and effective taboo. We argue that given the extensive publications, citations, and discussions of such work since 1969, claims of taboo and suppression are a myth. We critically examine claims that (self-described) hereditarians currently and exclusively experience major misrepresentation in the media, regular physical threats, denouncements, and academic job loss. We document substantial exaggeration and distortion in such claims. The repeated assertions that the negative reception of research asserting average Black inferiority is due to total ideological control over the academy by “environmentalists,” leftists, Marxists, or “thugs” are unwarranted character assassinations on those engaged in legitimate and valuable scholarly criticism.
최근의 논의로 인해, 인종 간의 지능 차이를 유전주의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오랫동안 엄격한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는 해묵은 주장이 되살아났다. 1969년 이래로 이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출판물과 인용들 및 논의들을 고려한 끝에, 우리는 금기나 억압이 실존한다는 주장이 허상임을 주장한다. 우리는 (자칭) 유전주의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유독 언론에 악의적으로 보도되고, 늘 신체적 위협을 받으며, 모욕을 받고, 학계에서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주장을 비판적으로 조사한다. 이러한 주장은 막대하게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다. 흑인의 평균적 열위성에 대한 연구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환경주의자들", 좌파들, 마르크스주의자들, 혹은 "꾼" 들이 학계를 이념적으로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고 가치 있는 학문적 비판에 임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인격모독이다.

 

"사회심리학은 좌파 학문이다." 사회심리학자들에게 이것은 '어그로' 가 아니라 그냥 씁쓸하게 웃으며 끄덕이고서 넘길 말이다. 현장에서 뛰는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Inbar & Lammers, 2012) 응답자의 6%만이 자신이 보수주의자라고 밝혔으며, 특히 사회적 영역에서는 진보 편중이 더 심하게 나타났다. 학문 전체의 이념적 편중이 체계적 편향을 일으킨다는 지적도 고래로 드물지 않았다(e.g., Crawford & Jussim, 2017; Jussim, Crawford, Anglin, & Stevens, 2015; Tetlock, 1994). 연구자들의 이념적 배경의 다양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식의 축적이 지장을 받는다면, 학문 공동체가 마땅히 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설득력 있는 논리다. (사석에서 술이 들어갔을 때 '더 적극적인' 메시지를 접할 수도 있겠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그 의중까지 알 수는 없다.) 그런데 학계 장악설이라는 '더 적극적인' 메시지가 비록 반박을 받는 형식으로나마 학술지에 활자화되는 일이 있었다.

문제가 불거진 주제는 사회심리학은 아니고 인지심리학이다. 요컨대 아프리카계의 IQ가 코카서스계의
IQ보다 뒤떨어진다는 '팩트' 를 발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학계를 장악한 좌파들의 억압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소위 신경현실주의(neuro-realism)라는 이름으로 열렬히 세일즈되는 바로 그 주장과도 닿아 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심리학도들은 Richard Lynn이라는 원로 심리학자가 그간 《Intelligence》 를 비롯한 유수의 학회지에 어떤 논문들을 발표해 왔는지 기억하고 있고, J. Phillippe Rushton이라는 또 다른 원로 심리학자가 어떤 저술을 했었는지도 들은 바 있기에, 인지심리학이 그렇게 뜬금없는 전쟁터로 느껴지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다른 데도 아니고 심리학계를 대표하는 리뷰 저널까지 이 전쟁터에 뛰어든 걸 보니 이번엔 단단히 작심한 듯싶다.

그런데 이 주제에서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대체 어떤 근거로 그런 주장이 나왔는가이다. 학계가 '장악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이고, 어떻게 장악할 수 있었는가? 불행히도 이에 대해 확실한 실증적 증거물을 보여준 '공익제보자' 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종의 지배 집단에 대한 피해의식만큼은 학술지에 오르거나(see Flynn, 2018), 단행본에 실리거나(see Stevens et al., 2017), 때로는 지난 2018년에 세간을 뒤집었던 수컷 변이 가설 사건처럼 Quillette 같은 논쟁적인 잡지에 실리기도 한다. 피해의 일화들은 많은데, 가해의 주체는 불명확하다. 결국 대중의 인지적 접근성(accessibility)이 높은 특정 사회적 범주가 그 가해의 주체의 자리로 등 떠밀려 올라간다.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단순히 이념적 동질성 문제가 아니라 '그들'(them)이 '우리'(us)의 학문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려면 가해의 주체를 더 명확히 내세워야 할 것이다.

학계에는 늘 논쟁적인 원고가 나오고, 수준 낮은 원고도 늘 나온다. 후자를 처리하기 위한 프로세스가 전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삐걱이기도 한다.
때로는 연구자들을 낯부끄럽게 할 만큼 감정적인 일처리가 진행되는 것도 사실이다. 원고가 거절되었다고 피해의식을 느끼는 것도 그래서일 터다. 하지만 나 같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원고가 거절되면 자기 주장의 설득력을 높일 길을 뼈아픈 마음으로 찾으며,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해도 학계 외부에 지원군 요청을 하지는 않는다. 학계의 상식은 가해자 없는 피해의식을 그 정도 선에서 관리한다. 이를 보도하는 매체들도 동일한 상식이 절실히 요구된다. 안타깝지만 Lynn이나 Rushton, Flynn 같은 80대 원로들에게는 (탄압 받는 사람들치고는 의외로) 학문적 피해의식을 동네방네 외칠 수 있는 메가폰이 있었다. 그러나 후학으로서 우리가 물려받을 것은 메가폰이 아니라 데이터와 근거로 움직이는 상식이다. 논쟁적인 주제를 공정히 다루는 품격까지 물려받는다면 더욱 좋겠다.



Crawford, J. T., & Jussim, L. (2017). Introduction to the politics of social psychology.
In J. T. Crawford, & L. Jussim (Eds.), Politics of social psychology (pp. 1-3). Psychology Press.
Flynn, J. R. (2018). Academic freedom and race: You ought not to believe what you think may be true.
Journal of criminal justice, 59, 127-131.
Inbar, Y., & Lammers, J. (2012). Political diversity in social and personality psychology. 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
7(5), 496-503.
Jussim, L., Crawford, J. T., Anglin, S. M., & Stevens, S. T. (2015). Ideological bias in social psychological research. In J. P. Forgas,
K. Fiedler, & W. D. Crano (Eds.), Social psychology and politics (pp. 107-126). Psychology Press.
Stevens, S. T., Jussim, L., Anglin, S. M., Contrada, R., Welch, C. A., Labrecque, J. S., ... & Campbell, W. K. (2017). Political exclusion
and discrimination in social psychology: Lived experiences and solutions. In J. T. Crawford, & L. Jussim (Eds.), Politics of social psychology (pp. 210-244). Psychology Press.
Tetlock, P. (1994). Political psychology or politicized psychology: Is the road to scientific hell paved
with good moral intentions? Political psychology, 15, 509–529.

바야흐로 우리는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국민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전웅빈, 임주언, 박세원, 2020) 2018년 이후 한국사회의 갈등이 갈수록 심각해졌다는 진술에 응답자의 73.4%가 동의했다. 한편 중앙일보 특별취재에서도(정종훈, 백희연, 편광현, 박건, 2021) 최근 1년 간 혐오표현을 접한 적 있다는 응답이 68.2%에 달했으며, 혐오로 인해 사회갈등이 심해질 거라는 응답은 무려 83.9%로 나타났다. 이 정도의 비율 데이터는 '누구는 겪고 누구는 겪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사회적 갈등의 전쟁터 속에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당연히 전쟁터에서 행복한 사람은 없다. 갈등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처방은 무엇인가?

사회적 갈등의 전쟁터에서 행복을 찾는 첫째 방법은, 그 전쟁에서 싸워 이기는 것이다. 사회 운동(activism)의 시각에서는 불평등과 부조리가 먼저 종언을 고해야 사회적 행복이 도래한다고 본다. 운동가들은 어서 빨리 싸워 이겨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의 품에 안기라고 독려할 것이다. 여성이슈에서 이런 관점을 취했던 Firestone(1970)에 따르면, 인간사는 그 자체로서 대립의 정치학으로 귀결된다. 같은 해에 캐롤 하니쉬(C.Hanisch)가 외쳤던 슬로건,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는 행복조차 개인적인 가치가 아니라 집단의 투쟁목표가 됨을 시사한다. 이들은 피압제자의 행복이란 압제자의 행복을 전복시킨 후에나 바랄 수 있는 것이며, 그 이전까지는 그저 허위의식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다른 방법으로, 사회적 갈등의 전쟁터를 떠나야 행복한 사람들도 있다는 시각이 있다. 사회심리학의 자기범주화 이론(이하 SCT)에 따르면(Turner, Hogg, Oakes, Reicher, & Wetherell, 1987), 전쟁터의 모두가 자신을 전사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SCT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을 자기개념에 반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이해한다. 내 자신이 여성, 노동자, 혹은 정치적 보수주의자라는 사실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 현저(salient)한 사람들만이 전사로 각성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사회적 갈등의 전쟁터 한가운데에 놓였다 해도, 이를 남의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 전쟁터를 떠나야만 행복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까지 '남의 전쟁' 의 최전선에 서게 되는 건 불행하다.

갈등의 시대 속에서 행복하기 위한 두 가지 처방 중에, 우리는 어느 하나만 내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사회심리학적 시각은 사회 운동가들에게 종종 "나이브하다" 는 비난을 받는다.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이들 '전사' 들에게, 전시이탈을 하라는 처방은 나이브함을 넘어 아예 나약함으로 비칠 것이다. 싸우기도 전에 다들 도망치면 사회적 부조리와 불평등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겠는가? 다행히 SCT는 전사들을 위한 희망적 예측도 내놓고 있다. 범주화의 양상은 안정적이기보다는 유동적이다(Onorato & Turner, 2004). 탈영병들이 다시 전장으로 귀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전사들과 어깨를 다시 나란히 하고 싸운다면, 이제 그들에게는 그것이 행복이다. 사회심리학은 단지, 모두의 처지를 고려하는 처방을 할 뿐이다.



전웅빈, 임주언, 박세원 (2020.12.10). "편가르기 3년... 정치가 사회 갈랐다" 국민일보 창간 32주년 여론조사. URL: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68811
정종훈, 백희연, 편광현, 박건 (2021.07.18.). 혐오, 마음을 집단 감염시켰다. URL: https://news.joins.com/article/24108120
Firestone, S. (1970). The dialectic of sex: The case for Feminist revolution. William Morrow & Co.
Onorato, R. S., & Turner, J. C. (2004). Fluidity in the self-concept: The shift from personal to social identity. European journal of social psychology, 34(3), 257-278.
Turner, J. C., Hogg, M. A., Oakes, P. J., Reicher, S. D., & Wetherell, M. S. (1987). Rediscovering the social group: A self-categorization theory. Basil Blackwell.

펜스 룰에 대해서 남녀는 각각 어떤 태도를 보일까? 2018년 미투 운동 이후로 정립된 대중적인 상식은,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펜스 룰에 우호적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적 관점의 저술가들도 동일한 인식을 공유하며, 일부는 "그들은 … 남성을 고발하는 여성들에 대해 '펜스룰' 이라는 방식으로 일종의 '복수' 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소곤, 2018)고 인식한다. 그러나 데이터는 이런 '남성만의 펜스 룰'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한국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이성택, 2018) 펜스 룰의 필요성에 대해서 남성들은 44.8%가 동의했는데, 여성들 역시 46.3%나 동의를 표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초점은 펜스 룰이 이처럼 남녀 모두에게 호소력을 갖는 이유가 무엇일지 사회심리학적으로 접근하고, 그리고 펜스 룰보다 더 바람직한 전략이 무엇일지를 이론에 비추어 논의하는 것이다.

집단 간 접촉 이론(intergroup contact theory)에 따르면(Pettigrew & Tropp, 2013; Vezzali & Stathi, 2016; for a review, Pettigrew, 1998) 여러 사회적 집단들은 상호 접촉을 통해 우호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며, 이 긍정적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는 다양한 요인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이론의 핵심 질문은 단순히 '접촉은 좋은가?' 가 아니라 '어떤 접촉이 좋은가?' 에 맞춰져 있다. Pettigrew & Tropp(2008)의 대규모 메타분석 결과는 두 가지 중요한 가늠자를 제시한다. 첫째는 불안(anxiety)이라는 정서다. 불안이 심한 상황에서 어울릴수록 그 어울림은 부정적으로 여겨지게 되고, 불안은 어울림의 긍정적 효과를 가장 크게 감소시킨다(Z=-26.55). 둘째는 감정이입(empathy)이다. 상대방이 지금 어떤 마음을 느끼고 있을지를 함께 느끼면서 다가간다면 그 어울림은 긍정적이게 된다(Z=-12.43).

이제 이 두 가지 정서를 바탕으로 현실을 진단할 수 있다. 펜스 룰이 남녀 모두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남녀 모두가 상대방 성별과 어울릴 때 극심한 불안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남성은 만에 하나 여성이 악의를 품었을 때 자신의 무고함이 법적으로 인정받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불안해한다. 한편 여성은 남성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겪게 될 성적인 가해나 구조적 억압을 예상하고 불안해한다. 접촉이 이렇게나 부정적이니, 접촉 자체를 단념하는 펜스 룰이 남녀 공히 인기를 끄는 것이다. 하지만 집단 간 관계는 긍정적 접촉으로써 개선될 수 있다(Pettigrew, 1998). 남성들은 여성들의 불안해하는 마음을, 여성들은 남성들의 불안해하는 마음을 자신의 마음처럼 느끼고 이해할 때, 남녀 모두 젠더의 전쟁터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부정적 접촉 상황에서는 펜스 룰이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갈등을 끝내려면 남녀가 긍정적 접촉을 경험해야 한다. 처방을 위한 논의는 다행히 이미 무르익어 있다. 사회심리학계에서 집단 간 접촉 이론이 개발되고 확장되며 설득력을 갖춰 온 역사는, 서로가 어울리는 상황이 긍정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요소들을 찾는 역사와도 같았다. 따라서 집단 간 접촉 이론을 활용할 경우, 남녀가 서로에게 느끼는 불안을 줄이고, 서로의 감정을 헤아리는 가운데 접촉하라는 처방이 나온다. 다시 두 문장으로 정리하자. "마음이 통하는 어울림은 펜스 룰보다 명백히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펜스 룰은 불안 속의 어울림보다는 더 바람직한 것처럼 여겨진다." 펜스 룰이 나쁘다는 주장을 하려면, 앞의 두 문장을 먼저 유념해야 원론적이고 비생산적으로 숟가락만 얹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소곤 (2018). 미투에 펜스룰로 대응하는 이들의 속마음: 왜 가해자에게 함께 분노하지 않는가. URL: https://brunch.co.kr/@cats-day/123
이성택 (2018.04.05.) 여성 절반 가까이 "펜스룰 지지"…
남녀 경계심 커졌다. URL: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04050458345555
Pettigrew, T. F. (1998). Intergroup contact theory. Annual review of psychology, 49, 69-85.
Pettigrew, T. F., & Tropp, L. R. (2008). How does intergroup contact reduce prejudice? Meta-analytic tests of three mediators. European journal of social psychology, 38, 922-934.
Pettigrew, T. F., & Tropp, L. R. (2013). When groups meet: The dynamics of intergroup contact. Psychology Press.
Vezzali, L., & Stathi, S. (2016). The present and the future of contact hypothesis, and the need for integrating research fields.
In L. Vezzali, & S. Stathi (Eds.), Intergroup contact theory: Recent developments and future directions (pp. 1-7). Routledge.

대한민국의 20대 남녀는 자신들을 어떠한 사람들이라고 바라볼까? 2021년 7월 1일, KBS에서 이와 관련하여 실시한 흥미로운 사회조사를 언급해 보고자 한다.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간의 잠재적 갈등 요소를 다양한 척도를 활용하여 검출하고자 하였다(송형국, 2021). 여기서는 그 일환으로 포함된 척도 중에 '따뜻함' 척도와 '능력있음' 척도를 2차원으로 결합한 조사결과에 주목하고자 한다(그림 1). 사회심리학자들은 이 척도가 고정관념 내용 모형(이하 SCM)이라는 이론적 조망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Fiske, Cuddy, Glick, & Xu, 2002). 다양한 값들에 산포된 데이터의 패턴을 보고, 어떤 이들은 세대론의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또 어떤 이들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심리학의 관점에서 해석할 경우, 이 데이터는 SCM이 예측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이상성을 지니고 있다는 가능성이 떠오르게 된다.

SCM을 제창한 이론가들에 따르면(Fiske et al., 2002),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내집단에 대해서 따뜻하면서도 유능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KBS 조사에서 7점 리커트 척도를 활용하였으므로, 내집단에게 두 차원 모두 중간값인 4점 이상으로 응답함으로써 내집단 편애를 드러낸 50대의 패턴은 이론으로 잘 지지된다. 문제는 20대 남녀의 응답인데, 내집단의 유능함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내집단이 따뜻하기보다는 차갑다고 여긴다. 사회의 모든 집단들이 따뜻하고 유능함, 따뜻하고 무능함, 차갑고 유능함, 차갑고 무능함의 4가지 조합 중 하나로 인식된다는 이론적 설명을 대입하면(Cuddy, Fiske, & Glick, 2008), 차갑고 유능하다는 사회적 집단 인지는 내집단이 아니라 부유층이나 전문직을 막연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더 가깝다. 대한민국의 20대 남녀들은 자기 자신들을 마치 고학력의 냉혈한 갑부인 양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론으로부터 데이터가 일탈했을 때, 그 이론은 진보를 이룸으로써 놀라운 통찰을 안겨준다. 하지만 당장 실증이 불가능한 현재로서는 두 가지의 대안적 설명만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첫째, 20대 남녀들은 같은 세대 혹은 코호트로 묶일지라도 서로를 내집단으로 여기지는 않기에 따뜻함 인지가 나타나지 않았을 수 있다. 20대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혹독한 경쟁자이고, 내 밥그릇을 빼앗아갈 수 있는 유능한 적수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파편화되고 원자화되어, 집단성(groupness)이 소멸되었을 수 있다. 둘째, 20대 남녀들에게 따뜻함이라는 속성은 더 이상 내집단의 덕목이 아닐 수 있다. 따뜻함은 그들이 '감성팔이' 와 '선동' 에 이끌려 부화뇌동하게 만들 뿐이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갈 세상에서 그들의 유일한 덕목은, 남에게 속지 않을 수 있는 이지적이고 냉철한 판단력밖에는 없다. 그들에 따르면 자신들에게 그런 따뜻함은 없고, 따뜻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과몰입' 해서 혼자 '불타는' 것에 불과하다.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는 20대가 자신들이 유능하지만 냉담한 사람들이라고 느낀다는 가능성을 SCM을 통해 우연히 드러내 보였다. 불행히도 KBS 보도에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데이터는 적절히 공개되기만 한다면 사회심리학자들의 후속 분석에 크게 활용될 수 있으리라 보인다. 어떤 이유에서든 20대 남녀는 언제부턴가 자신들이 따뜻한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렸다. Cuddy et al.(2008)은 차갑고 유능한 집단 구성원들을 향해 두 가지 행동 패턴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집단 구성원들의 차가운 면모가 강조될 때에는 능동적 공격성이, 유능한 면모가 강조될 때에는 수동적 순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20대 남녀들의 극단화되는 갈등과 공정 담론으로 대표되는 시험과 경쟁에 대한 요구는, 능동적 공격성과 수동적 순응의 두 가지 행동 패턴으로 예기치 못하게 설명된다. 남은 것은 실종된 따뜻함 인지를 이들에게 되찾아주는 일이다.

그림 1.


송형국 (2021.07.01.).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 ② 50대의 '꼰대 지수'는 몇 점? URL: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16479 
Cuddy, A. J., Fiske, S. T., & Glick, P. (2008). Warmth and competence as universal dimensions of social perception: The stereotype content model and the BIAS map. Advances in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40, 61-149.
Fiske, S. T., Cuddy, A. J., Glick, P., & Xu, J. (2002). A model of (often mixed) stereotype content: competence and warmth respectively follow from perceived status and competi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82(6), 878-902.

출범 4년에 가까워지는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현재까지 가장 많은 동의를 얻은 청원 기록은 무려 202만 6,252명에 달한다. 이 청원은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것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4%에 달하는 인구가 특정 성범죄 사건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2020년도에 발간된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조사에 따르면, 여성들의 57.0%와 남성들의 44.5%가 범죄로부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의식 속에서 적잖은 논자들이 여성들의 공포에 귀기울이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의 진보라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공포는 진보의 정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사회의 변혁과 발전을 이끄는 정서는 분노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비단 사회 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사회심리학 문헌에서도 확인 가능한 내용이다. 사회적 변화(social change)를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들은 (e.g., Frijda, Kuipers, & Schure, 1989; Van Zomeren, Postmes, & Spears, 2008) 대중의 집합적 분노(collective anger)와 정치적 효능감이 사회 운동의 참여를 촉진함을 확인하였다. 즉 현실의 부조리함을 정당화하지 않고 분노하면서, 자신들이 유의미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다른 요인들까지 함께 작용하면서 사람들이 사회적 변화를 위해 애쓰게 되고, 결국에는 진보가 이루어지게 된다.

반대로, 사회심리학자들은 공포가 그 사람의 사회적 태도를 보수화시킨다는 것을 확인하였다(see Jost, Stern, Rule, & Sterling, 2017). 일군의 연구자들은 우익 권위주의(이하 RWA)가 높은 사회적 태도와 이 세상이 '무서운 곳'(dangerous world)이라는 세계관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였다(Duckitt & Sibley, 2010). 일신의 안전이 위협 받고 개인이 취약해지게 되는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확고한 권위에 스스로를 의탁하며, 모험을 피하고 관습을 선호한다. 성범죄에 대한 공포가 극심할 때, 비록 그것이 정부 공권력이든 관습적인 '강간 예방수칙' 이든 심지어는 늠름한 남자친구의 완력이든 간에, 공포에 질린 여성은 그 밑에 숨어 움츠러들게 된다.

공포를 바탕으로 추동되는 진보적 변화는 달성되기 어려우며,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진보가 될 수 없다. 사회 운동가들은 "무서워서 못 살겠어요!" 라는 절규를 진보의 원동력으로 삼는 듯하나, 그 공포를 해소하는 것은 사회를 안전하게 하겠다는 RWA의 달콤한 약속뿐이다. 사회에 불안과 패닉이 팽배할 때 권위주의의 무대가 가장 빛난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 이슈를 보호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또 다른 가부장제에 불과하다는 Badinter(2003)의 지적은 현대 대한민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모든 약자들은 범죄로부터 보호받아야 마땅하나, 이를 굳이 생존의 문제로 호소하겠다면 그 운동은 사회를 진보적으로 변화시키리라 보기 어렵다.



Badinter, E. (2003). Fausse Route. Editions Odile Jacob.
Duckitt, J., & Sibley, C. G. (2010). Personality, ideology, prejudice, and politics: A dual-process motivational model.
Journal of personality, 78(6), 1861-1894.
Frijda, N. H., Kuipers, P., & Ter Schure, E. (1989). Relations among emotion, appraisal, and emotional action readines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57(2), 212-228.
Jost, J. T., Stern, C., Rule, N. O., & Sterling, J. (2017). The politics of fear: Is there an ideological asymmetry in existential motivation? Social cognition, 35(4), 324-353.
Van Zomeren, M., Postmes, T., & Spears, R. (2008). Toward an integrative social identity model of collective action:
A quantitative research synthesis of three socio-psychological perspectives. Psychological bulletin, 134(4), 504-535.

기성세대 사회과학도가 자신이 몸담은 세상에 대한 연구의 의욕을 느끼듯이, 신세대 사회과학도도 그들이 몸담은 인터넷 공간에 대한 연구의 의욕을 똑같이 느낀다. 흔히 컴퓨터 매개 소통이라고 불리는 인터넷 공간에도 문화가 존재하나, 이에 대한 연구는 기성 학계가 낯설어하는 가운데 간신히 움트기 시작하고 있다(모현주, 2020). 신생 학문분야는 교도권이 명확하지 않기에 이 주제 역시 문화인류학에서 비평 이론까지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진다는 점은 환영할 만하나, 그 기초가 차근차근 충실하게 쌓이며 성장하는지 감시하는 것은 참여 연구자 모두의 몫이다.

직관적으로, 신생 분야로서의 인터넷 문화 연구에는 탐색적 연구의 비중이 높을 것이 기대된다. 참고로 신생 학문의 정립과정을 논의한 Passmore & Theeboom(2016)은 초기 연구 단계에서 사례연구를 제안하고 있으나, 그것이 단순한 예시화(illustration)를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례 선정의 엄격한 정당화가 요구된다(Yin, 2009). 내부자 관점의 연구가설 개발을 위해서는 인터넷 에스노그라피(조영한, 2012; Hine, 2000)도 하나의 방법이다(e.g., 이길호, 2010). 혹은 심층면접법도 연구의 주춧돌을 놓기에 적합한 탐색적 도구가 될 수 있다(e.g., 김학준, 2014).

향후 탐색이 충분히 누적되어 인식의 틀이 완성된다면, 연구자들은 그 이론을 가지고 확인적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확인적 연구 또한 새로운 지식의 생산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진욱(2011)은 비판적 담론 분석(이하 CDA)에 대해서, 연구자가 이미 가진 특정한 가치판단을 재확인하기 위해 뻔한 분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확인적 연구에서도 연구자의 연구가설은 여전히 교정의 대상이다. 인터넷 문화를 CDA 혹은 광범위한 담론의 용어로 접근할 때(e.g., 김수아, 2020), 연구자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명시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 문화 연구가 아직 초기 단계임을 고려하면, 지금은 연구자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하기보다는 어떤 생각을 품어야 할지부터 고민할 시점이다. 신세대 사회과학도들에게 인터넷 공간은 자신이 몸담은 익숙한 공간이며, 연구를 시작하기 전부터 자신이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느끼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또 다른 통념이론(lay theory)에 그칠 수 있다. 이런 초기 시점에 탐색적 연구보다 확인적 연구에 매력을 느끼는 연구자는, 자신이 가진 통념이론이 옳다는 주장을 학문의 언어로 정당화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김수아 (2020). 지식의 편향 구조와 혐오: 국내 위키 서비스 '여성혐오' 논란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 & 문화, 35(1), 141-183.
김학준 (2014).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모현주 (2020). 인터넷 문화 연구의 어려움. URL: https://brunch.co.kr/@hyunjoomo/578
신진욱 (2011). 비판적 담론 분석과 비판적·해방적 학문. 경제와 사회, 89, 10-45.
이길호 (2010). 우리는 디씨: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증여, 전쟁, 권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조영한 (2012). 인터넷과 민속지학적 수용자 연구: 인터넷 에스노그라피의 가능성과 과제. 미디어, 젠더 & 문화, 21, 101-134.
Hine, C. (2000). Virtual ethnography. SAGE.
Passmore, J., & Theeboom, T. (2016). Coaching psychology research: A journey of development in research. In L. E. van Zyl, M. W. Stander, & A. Oodendal (Eds.), Coaching psychology: Meta-theoretical perspectives and applications in multicultural contexts (pp. 27-46), Springer.
Yin, R. K. (2009). Case study research: Design and methods. SAGE.

영어권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도는 짤방 중에 이런 것이 있다. MAGA 모자를 쓴 트럼프 지지자가 2019년 홍콩 시위 때의 방화를 보면서는 환호하더니, 2020년 조지 플로이드 흑인 시위 때의 방화에 대해서는 사유재산의 침해라며 분개한다는 것이다(그림 1). 시위는 기성 체제의 정당성과 권위에 도전하고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위협하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이 (특히 방화와 무질서가 동반된) 시위를 비난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익숙하다. 그런데 이 짤방에서 시사하듯, 어떤 종류의 시위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비난받지 않는다. 심지어는 단순한 관망을 넘어서 지지 성명을 발표하는 등의 적극적인 지원을 하는 경우도 있다.

도덕적 기반 이론(이하 MFT)에 따르면(Graham, Haidt, & Nosek, 2009),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도덕성 판단을 할 때 서로 다른 가치의 기반에 근거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어떤 시위가 타인을 해치지 않으면서 공정함을 추구한다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보는 반면, 보수주의자는 그 시위가 만약 내집단을 배신하거나, 권위를 짓밟거나, 인간의 고귀함을 더럽힌다면 도덕적 비난을 하게 된다. 따라서 MFT는 왜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주의자들보다 시위에 반감을 더 많이 드러내는지 설명한다. 시위는 국가에 대한 배신이요 체제에 대한 전복 행위이기 때문이다. 국가에 충성하고 기성 체제를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관에서 시위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회적 정체성 이론(이하 SIT)의 프레임워크는 어째서 보수주의자들이 그들의 도덕적 가치에 어긋나는 시위를 지지하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Mummendey & Schreiber, 1983), 사람들은 긍정적인 내집단 독특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며, 내집단과 외집단의 차이로부터 내집단의 우월성을 발견한다. 즉 부도덕해 보이는 시위에 보수주의자들이 찬사를 보내려면, 적어도 그것이 외집단의 시위여야 한다. 그들은 외국의 시위대를 지지하는 동안 심리적으로는 자국의 체제와 질서에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따라서 SIT는 우리의 판단에 도덕적 가치가 무조건 적용되는 게 아니라 내집단의 독특성 여부도 중요하게 관여함을 암시한다.

우리는 가치에 충실하려는 한편으로 긍정적인 내집단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에도 충실하려 한다. 이는 국내 보수주의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이 광주 민주화운동을 비난하는 것은 그것이 심리적으로 신군부의 권위라는 가치를 위협하기 때문이다(MFT). 그러면서도 그들이 홍콩·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그것이 심리적으로 내집단의 긍정적인 면을 확증하기 때문이다(SIT). 이런 상호작용이 경험적 연구로 확인된다면, 안국동 태극기 집회나 미국 국회 점거 사건 같은 내집단의 무질서한 시위를 긍정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진보주의자들도 때때로 진영논리에 의해 가치를 저버리게 될 것인지가 그 다음 연구문제가 되리라 본다.



Graham, J., Haidt, J., & Nosek, B. A. (2009). Liberals and conservatives rely on different sets of moral foundation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6(5), 1029-1046.
Mummendey, A., & Schreiber, H. J. (1983). Better or just different? Positive social identity by discrimination against, or by differentiation from outgroups. European journal of social psychology, 13(4), 389-397.

그림 1.

대한민국 사회에 공정의 개념이 이슈가 되고 있다. 《공정한 경쟁》(2019)을 저술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2021년 6월 11일 당대표 선거에서 당선됨에 따라, 대한민국 제도권에서 공정을 고찰하기 위한 논의의 장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 논의의 장에 이준석 대표뿐만 아니라,《공정하지 않다》(박원익, 조윤호, 2019), 《능력주의와 불평등》(홍세화, 2020), 《K를 생각한다》(임명묵, 2021) 등 논객들이 여러 저술을 앞세워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다양하고 풍부한 이론들을 동원할 때 그 논의도 생산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 따라서 논객의 공급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논의를 위한 지적 자원의 공급이라 하겠다.

먼저, 논의에 필요한 지적 자원은 기존에 존재하는 이론적 인식의 틀을 탐색함으로써 얻어진다. 어떤 사회과학적 이론으로 공정 이슈를 설명할 수 있는가? 공정을 경제적 문제로 환원하여 일자리 많이 만들면 다 해결된다고 인식할 수도 있지만, 공정은 그저 명분에 지나지 않고 그 본질은 파워 게임이라는 관점을 따를 수도 있다. 이처럼 지적 자원의 다양성은 이론적 영역(domain)의 차이를 통해 확보된다. 또는, 공정을 개인 내면의 심리적 문제로 보거나 반대로 거시사회적 구조의 문제로 보는 등, 이론의 수준(level)의 차이로도 다양성 높은 지적 자원들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지적 자원을 직접 창출함으로써 건설적 논의에 기여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컨대 공정이라는 이슈를 해석하기 위해서 먼저 그 이슈에 참여하는 공중의 인식을 빌릴 수 있다. 심층면접법(IDI), 초점집단면접법(FGI)과 같은 도구들은 타당한 이론의 개발을 위한 기초가 된다. 다른 방법으로, 서사연구나 특히 생애사연구를 해석의 도구로 활용할 경우에는 공정의 개념을 이슈 참여자의 관점에서 서사적이고 생생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접근은 기존의 이론들이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과 유리되어 공정 개념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중요성이 크다.

공정 논의의 장에 참여하는 논객들에게 지적 자원을 공급하는 역할은 사회과학도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기존에 존재하는 이론을 소개하거나, 적합한 이론이 없을 경우 직접 이론을 개발할 수 있다. 논의의 장에서 지적 자원의 소비자인 논객들만 증가하고 공급자인 사회과학도들은 활동하지 않는다면, 그 논의의 장은 헛돌거나 심지어는 황무지가 될 수 있다. 가능한 한 다양하고 풍부한(diverse and rich) 관점·시각·접근·인식·이론들을 제시함으로써, 사회과학도들은 공정 논의의 장이 활기차게 되고 흥미진진한 성과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원익, 조윤호 (2019). 공정하지 않다: 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 지와인.
이준석 (2019). 공정한 경쟁: 대한민국 보수의 가치와 미래를 묻다. 나무옆의자.
임명묵 (2021). K를 생각한다: 90년대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사이드웨이.
홍세화 (2020). 능력주의와 불평등: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에 대하여. 교육공동체벗.

+ Recent posts